왕십리홍

20230426 번아웃을 재해석하는 건에 대하여.

홍니버스 2023. 4. 26.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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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부터 준비해 온 독일 석사, 졸업이 코 앞에 닥치니 또 이런다. 번아웃. 

4월 둘째 주쯤 독일의 큰 연휴 기간이 있다. 부활절이다. 보통 이 기간에는 짧게는 4일부터 길게는 열흘까지 연차를 내고 연휴를 즐긴다. 한국에서의 큰 명절이 연초 구정과 가을쯤 추석이라면, 독일에서의 큰 명절은 봄의 부활절과 겨울의 크리스마스 및 연말 기간인 것 같다. 이때는 다들 쉬엄쉬엄 하는 기간이다. 

나는 부활절을 맞아 논문에 집중하고 남편과 쉬는 Work hard & Play hard 한 일정을 계획했다. 그런데 딱 부활절 연휴 직전 날부터 몸이 아팠다. 그전 주 남편이 아팠는데, 코로나 걸렸을 때와 거의 똑같은 증상이었고, 그가 나을 쯤에는 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코로나 걸렸을 때와 똑같은 증상이었다. 으슬으슬 추운데 몸에 열이 나서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 코로나 걸렸을 때처럼 목소리가 완전히 나갔고, 2주가 지난 지금도 그때처럼 몸에 가래가 낀 듯 불편하고 쉽게 피로해지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테스트를 해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에, 코로나 검사도 이번엔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걸 코로나 재감염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기간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논문은 커녕,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아팠다. 너무 열이 나서 눈도 뜨끈뜨끈 피로해지니까 넷플릭스를 보는 것도 피곤했다. 그냥 거실 소파에 누워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쬐면서 누워 있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1주일 정도 내리 아프고 정신 차리니 4월 중순이 되어 있었다. 4월 내로 1차 Literature review를 끝내는게 목표였는데, 몸이 아파서 1주일을 잃어버린 것이다.

조금 회복 되었다고 느꼈을 때부터 다시 논문을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재가공할 부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1차 문헌조사라고는 하지만 이 부분부터 나름의 공을 들여서 글을 쓰고 있었다. 목표한 시간 안에 못 끝내는 것보다는 엉성하게 80% 정도 만이라도 만들어보자고 생각해서 1주일 내 8~10장을 써 내렸다. 

그와 동시에 워킹스튜던트 일이 바빴다. 보통은 일하는 시간 중 80% 정도가 일에 할당되고, 20% 정도는 여분의 시간으로 계획을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할 틈 없이 바빴다. 팀에 새로운 팀원이 매달 영입되고 있는데, 팀원들 업무를 서포트하는 워킹스튜던트 포지션이다보니 각각 팀원들의 업무 성향, 요구사항에 따라서 들어가는 노력이나 시간에 차이가 나면서 발생 한 문제였다. 점심 빼고는 휴식 시간이 전혀 없이 8시간 내리 일과 미팅만 하게 되는 날들이 생겼다. 

그와 또 동시에, 결혼식 피로연 파티 계획을 시작해야 했다. 결혼식에 어떠한 기대가 없던 나와는 달리, 가족과 파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댁, 게다가 많은 형제 중 장남의 결혼이라는 상징성까지 더해지니 차마 내가 하고싶은 대로 안 할 거야! 를 외칠 수 없었다. 물론 안 한다고 강경하게 밀어붙일 수도 있었지만, 남편 가족에게는 중요한 가치들을 그저 싫다고 배척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그의 가족들도 나를 새로운 가족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을 텐데 나 혼자 내 멋대로 할 수 없었다. 

독일에 사는 외국인으로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나를 귀찮게 했다. 독일인 배우자 체류허가를 신청한 것은 도무지 연락이 없었고, 하는 것부터가 귀찮은 단계의 연속이었던 첫 독일 연말정산은 당해년도 한국 소득 증명을 해야 처리해 줄 수 있다는 편지 (스러운 경고장)을 받았다. 4월 초에 독일어 회화를 매일 공부하겠노라 다짐했고, 그렇게 하고 있지만, 영어에 비해서 독일어에 흥미를 붙이기가 어려웠다. 독일어에 흥미가 붙지 않으니, 배움이 재미가 없고, 배움이 재미가 없으니 억지스럽게 나를 밀어붙여서 학습하게 하는 과정이 스트레스로 느껴졌다. 한국 대학생 때 온갖 흑역사를 쌓은 이후 파티나 술자리와는 이별한 사람인데, 독일 결혼식에 초대되는 것도 불필요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노트북 모니터가 고장이 났는데, 수리를 하려면 500유로(현재 환율로 74만원)가 든다고 한다. 삼성 제품이라서 한국 서비스 센터에서는 200유로 정도면 고칠 수 있는데.

작년 여름 이후부터 남편이 자주 아팠다. 평균을 내보자면 2달에 1번 정도는 최소 열흘 이상 병가를 내야할 정도였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면서 계속되는 그가 아픈 동안 집안일, 논문, 회사 일을 전담하게 되는 상황이 힘들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그가 아프려고 아픈 것도 아닌데, 아내로서 이런 마음을 갖는 내가 나쁜 사람처럼 느껴져서 속이 상했다.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의 연속이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들 투성이었다. 

하고 싶은 것들은 할 수 없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볼 수 없었고, 그들을 만날 날조차 약속할 수 없다. 

언제부터 이렇게 주말이 없이 나를 옥죄이며 살았을까? 되새겨보니 2020년 독일에 올 준비를 할 때부터였다. 한국에서 직장인으로 근무하면서, IELTS, GMAT, 지원서류를 준비하느라 주말이 없이 지냈다. 2021년 독일에 오기 전에는 한국에서 혼자 살던 집을 정리하고, 퇴사를 하고, 오는 과정을, 석사 과정의 시작과 함께 생각지도 못했던 문화척 차이와 차별들을 겪어야 했고, 2022년부터 일과 공부를 병행하기 시작했고, 2023년 인륜지대사 중 하나인 결혼을 했고, 일과 공부와 구직과 적응을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20년부터 4년째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다 끌어내서 매일을 살고 있는데, 그럴수록 더 많은 과업이 던져지기만 하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언제쯤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자고 싶을 때까지 늦잠을 자고, 내키는 대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거야?

이런 생각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회사에서 가서 평소처럼 일하고, 동료들과 대화를 하면서 나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뒤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계속해서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피곤해, 집에 가서 자고 싶어, 그만하고 싶어, 날 좀 내버려 둬"

번아웃이다. 

이 때문에 지난 며칠은 논문 파일에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일이야 안 하면 당장 티가 나니까 미룰 수 없지만, 미룰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미루고 싶었다. 게다가 진척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해 놨으니까 나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근데 이렇게 미루면 해야 할 일의 덩어리가 커져서 결국에는 나를 짓누르게 될 것이란 걸 알기에 미루고 싶지 않았다. 미루고 싶지 않은데, 뭔가를 할 수도 없는 그런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 

다행인건, 나의 번아웃은 내가 목표에 다다랐다는 증거 같은 거다. 이런 마음이 오늘이 처음도 아니고. 나는 항상 끝에 다다를 때쯤, 90% 정도를 끝낸 때 쯤 이런 상태에 빠진다. 그래서 목표치를 조금 낮추더라도 다시 해야 하는 모든 일을 해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나는 나를 안다. 만약에 모든 일의 진척이 0% 였다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도 않는다. 고등학교, 대학교, 구직, 직장생활 항상 비슷한 나만의 패턴이었다. 번아웃 오기 직전까지 나를 밀어붙여서 80~90% 결과를 만들면 갑자기 하기 싫다고 하고 퍼지는 나를. 그럴 때 무리해서 밀어붙이면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안 하면 나중에 후회를 하더라.

이 상태를 느끼다니 2020년부터 준비해 온 독일 석사 라는 큰 챕터의 막을 내릴 때가 정말 다가왔나보다. 나의 번아웃은 다 됐다는 신호니까, 조금만 더 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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