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입사 4개월차였다. 미팅이 많은 어느 날 오후 5시, 갑자기 매니저 W가 전화를 했다. 응? 불과 몇 시간 전에 미팅을 하고 W는 일 있다고 먼저 집에 갔는데...
"이런 얘기는 보통 F2F로 할텐데 일찍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독일에서 수습기간은 프로베자이트 Probezeit 라고 하며 통상적으로 6개월이다. 그 기간 내에서는 회사 측에서든 피고용자 입장에서든 2주 정도의 짧은 노티스 기간을 갖고 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 이 기간이 지나면 사측에서 원해도 해고가 어렵고, 직원 입장에서도 최소 3개월 이상 노티스 기간을 거쳐야 한다. 통상적으로 6개월 수습은 다들 무난하게 통과하지만, 그래도 법적으로 언제든 계약종료가 가능하니 서로 조심하는 기간이다. 이를 악용해서 첫 6개월은 열심히 일하다가, 수습을 넘기는 순간 병가를 내버리거나 일을 더 이상 열심히 안 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혹은 성과가 아주 저조한 경우 사측에서 계약종료를 통보하기도 하는데, 주변에서 몇 번 본 경우가 있기도 하다. 따라서, 대게 (~85%) 문제없지만, 100%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는 기간이다.
아무튼, W는 전화한 이유를 바로 알려줬다.
"예외적인 경우로 수습기간에 대한 피드백을 빨리 줘야하는 경우가 됐어. 내가 이미 부장 및 부서장급과 미팅을 했고, 최종적으로 OO과 계속에서 일하고 싶다는 피드백을 HR에 줬어. 아마도 HR이 OO에게 연락해서 재확인을 할 수 있으니,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즉, 통상적으로 6개월 걸리는 수습기간을 만 4개월만에 끝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워낙 예외적인 경우여서 W는 일단 두고 보자고 했고, 나도 섣불리 이 얘길 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주, HR에서 "공식적으로 온보딩 Onboarding 끝낸 것을 축하합니다" 라는 이메일을 받게 되었다. 정말로... 프로베자이트를 4개월 만에 끝낸 것이다! 소식을 들은 친구들과 가족들이 축하해 주었고, 파티를 열어야 한다고 했지만 (참고로 독일에선 이런 축하할 일 생기면 작게 모여 축하하고 수다 떠는 것을 자주 한다.), 집순이인 나는 그저 호호호 한동안 웃고 다니며 행복하게 매일을 지내는 것으로 나만의 축하를 마쳤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입사 6개월이 되어 갈 때, 세운 다음 목표는 신제품 출시 업무에 관여하는 것이었다. 업무 초반에는 루틴한 업무에 익숙해지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꽤나 손이 익숙해진 터였다. 그래서 W에게 틈날 때마다 말했다, "신제품 출시 업무 하고 싶어. 내가 리드하는 포지션 아니고, 서포트하는 자리여도 괜찮아. 업무 프로세스 익히고 배우고 싶어. 기회 있으면 꼭 알려줘!"
그리고 머지않아 이 말이 곧 기회로 돌아왔다. 평소같이 F2F 주간 미팅을 시작할 때, W가 물었다.
"우선 이거부터 얘기하자. OO, 이 제품 포트폴리오를 맡아보는 거 어때? 곧 신제품 출시도 예정되어 있어...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포트폴리오였다, 더 들을 것도 없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즉답했다. 이미 알고 있는, 하고 싶었던 포트폴리오였거든.
빠른 대답에 W는 껄껄 웃고는 뜻밖의 소식을 이어 전했다.
"좋아, 그럴 것 같았어. 그리고 부장 부서장이랑도 논의 해봤는데... 너한테 Early Promotion을 제안하고 싶어. 내규에 따르면 최소 2년은 걸려야 승진이 가능해. 하지만 우리 네 성과에 모두 굉장히 놀랐고 깊은 인상을 받았어, 그리고 네가 다음 레벨 직무를 맡을 만한 역량이 있다는 것에 모두 동의하거든. 지난 6개월밖에 안되는 시간 동안 너는 기존 업무를 마스터했고, 이제 새로운 업무까지 맡고 싶어 하잖아."
이번엔 너무 큰 놀라움과 기쁨이 들어서, 대답하기까지 2초 쯤 시간이 걸렸다.'조금 더 배팅을 해서 협상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앞으로도 그런 협상을 할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업무 성과와 네트워킹으로 나를 증명하는 이상. 그러니까 이번에는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고, 받아들이고, 내실을 쌓는데 집중하자고 생각을 고쳤다.
그렇게 입사 6개월만에 수습과 승진을 마쳤다. 수습기간을 보통 걸리는 시간보다 빨리 끝내는 것만 해도 굉장한 성과라고 생각했는데, 남들보다 세배는 더 빠르게 입사 6개월 만에 승진을 하게 된 것이다.
9개월차가 된 요즘은 신제품 출시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업무를 배우느라 정말 정신이 없다. 그런데 그 바쁨이 너무 감사하고 기쁘고 벅차다. 지난 몇 년간 석사를 하면서, 그리고 작년 취업준비를 하며 마음 고생했던 게 다 보상받는 기분이다. 내게 딱 맞는 자리를 찾기 위해 그 몇 년을 투자했던 건가 봐, 하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행복하고 감사하다. 그 밖에 더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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