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홍

토종 한국인이 본 독일 03. 토론, 왜 이렇게나 많지?

홍니버스 2024. 8. 12. 17:25
반응형

*개인적 경험에 바탕한 주관적 생각입니다. 일반화는 지양합니다.*

독일에는 토론이 정말 많다. 어떤 안건이든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생각을 나누고, 결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토론을 거치지 않은 결정을 일방통보한다면 상대는 굉장히 기분 나빠할 것이다. 비록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더라도 토론/대화를 하자고 요청하여, 왜 이렇게 생각하고 필요한지를 피력해서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무엇이든 이 과정을 거치느라 빠르게 진행되지가 않는다. 

문득 아웃룩 캘린더를 보아하니 꽤 많은 미팅이 있는데 그 중 다수가 이러한 토론 목적인 것을 발견했다. 한국에서는 뚜렷한 결론을 내야 하고 명확한 목적이 있을 때에만 미팅 요청을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국에서의 미팅은 꼭 필요해야 하는 것이었다면, 독일에서의 미팅은 그냥 항상 하는 것이다. 

독일에선 왜 이렇게 토론이 많을까 생각해봤는데, 문득 석사 때부터 자주 듣던 한 단어와 연결이 된다고 느꼈다: "민주주의"

석사 때 팀 프로젝트 팀을 4개로 쪼개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그런데 특정 주제 1개가 인기가 없어서 나머지 3개로 학생 과반수가 몰린 상황이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교수님이 분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참고로 내가 & 학생들이 가장 싫어한 교수였다) 1시간을 주면서 학생들끼리 비인기 주제 팀에 "자원" 할 사람을 "민주적"으로 뽑아내라고 했다. 나를 비롯한 학생들은 그 방식이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민주적"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가, 어떤 이유로 동급생을 그룹에서 쫓아낸다는 것인가? 운이 없게도 나는 그날 오전 워킹스튜던트 면접을 보고 오느라 수업에 조금 늦어서 자동적으로 비인기 주제에 배정되었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교수는 "나는 독재자처럼 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너에게 다시 한번 물어볼게, OO 너 XYZ 주제 팀에 가고 싶니?"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선택지가 없는데, 민주주의를 들먹이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굉장히 가식적으로 느껴지고 불쾌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 "... 이거 말고 제게 주어진 선택지가 있긴 한가요?" 그녀는 멋쩍게 웃었고, 나는 그 웃음마저 짜증이 난다고 생각했다. 

또 한 번은 생일 파티 겸 저녁식사에 초대되었을 때 이야기이다. 열명 남짓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함게 갔는데, 애피타이저로 뭔가 시키고자 했다. 나는 그저 종류별로 한두 가지 시켜서 나눠먹자고 생각했고 제안했는데, 독일인 G는 "모두"가 동의하는 메뉴를 시켜야 한다고 했다. 결국엔 두어 가지 종류를 시켜서 나눠먹었으므로 결괏값은 같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초기의 문제 접근법이 달랐다. 나는 효율적으로 빠르게 시켜서 음식을 먹고 싶다는 다소 Top-down 적이었음에 반해, 식탁에 있는 모두가 행복하게 먹을 음식을 찾아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접근법이었으니까.

그만큼 "민주주의"가 독일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전혀 민주적이 될 수 없는 상황 혹은 굳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싶은 상황에서도 굳이 그 가치를 추구하려고 하는 것, 그 만큼이나 민주주의는 독일에서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위해선 구성원 개별의 생각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구성원들 개별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선, 그러한 의견을 묻고 다루는 토론의 과정이 필요하다. 사회 전반에 이러한 가치와 과정이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토론은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삶의 일부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가치와 문화를 새로 받아들여야 하는 제3국 외국인인 나의 입장에서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물론 독일인 중에서도 모두가 똑같이 민주주의와 토론을 중요시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니까. 토론 문화를 자조적으로 비꼬며 비판하는 독일인들도 있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이러한 토론에 대한 경향성이 이곳엔 존재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뿌리는 민주주의 가치 추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점도 분명히 있는 문화지만, 나는 이제 독일의 토론 문화가 좋다. 처음엔 느리고 답답하던 이 문화도 4년차가 되니 점점 익숙해졌기도 하고. 오히려 누군가 충분한 토론을 거치지 않고 통보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내 생각이 충분히 존중되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아, 그렇지만 이른 아침 - 8시 반- 토론 미팅은 되도록 안 잡혔으면 좋겠다.. 토론하기에 너무 이르다고!

끝!

 

반응형